현재 관광지로 유명한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오랫동안 상인의 도시로 더 유명했다.
이건 돈을 아는 그들의 이야기 중 하나다.
최고 통치자 vs. 신의 대리인
붉은 수염으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1세 |
바바로사를 굴복시킨 교황 알렉산더 3세 |
12세기 후반, 유럽은 왕권과 교황권의 충돌로 전운이 감돌았다.
신의 대리자로 전 유럽을 쥔 교황청과 유럽 최고의 권력자로 거듭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충돌 때문이었다.
1157년, 교황 하드리아누스는 서간을 통해 제국이 교황의 봉토임을 선언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하며 교황 맞섰다.
갈등은 교황 선출에 관한 문제로 더욱 심화된다. 1159년 알렉산더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프리드리히 1세는 별도의 선거를 실시해 대립 교황 빅토르 4세로 옹립한다. 로마 교황청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알렉산더 3세는 즉시 프리드리히 1세를 파문한다.
몇 차례의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며 로마를 압박하던 프리드리히 1세는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 패하며 그 기세가 꺾였다.
교황 알렉산더 3세와 프리드리히 1세 사이에 오랫동안 곪은 갈등이 터지려 하고 있었다.
중재자의 등장
유럽 무역 중심지인 베네치아는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안정적인 무역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는 걸 아는 베네치아는 중재자 역할을 자처한다.
1177년, 베네치아의 도제 세바스티아노 치아니는 황제와 교황을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중립지역 '캄포 포르미오'로 초대한다.
캄포 포르미오의 조약
베네치아는 적극적인 외교 노력으로 양측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결국 캄포 포르미오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은 교황권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대신, 황제의 정치적 권위도 확립하는 타협안이었다. 이로 인해 교황 알렉산더 3세의 위치는 강화되었고,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에서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황제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고 대립교황을 폐지했다. 교황 또한 황제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 조약은 유럽의 균형을 바로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베네치아의 위상을 올리는데 기여한다. 하지만 상인의 도시 베네치아가 이 이유만으로 이 판을 벌인 건 아니었다.
진짜 이유
알렉산더 3세는 평화를 중재한 보상으로 베네치아 도제 세바스티아노 치아니와 선물을 교환한다. 이는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게 교황, 황제, 그리고 도제가 동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을 알렸다.
자치권과 독립성을 인정받은 베네치아는 높아진 위상을 바탕으로 무역 경로를 보호했고 시장을 안정시켰다. 이 결단으로 베네치아의 중세 황금기는 15세기까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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